2009년도에 떠났던 더일렉 의료캠프
이미 2년이 지난 일이지만 사진을 들추어 보다가 생각나서 글을 올린다.
2009년 여름에는 비가 참으로 많이 왔고, 그 결과 수질성질병이 서부지역을 강타했다.
의사도 없고 마땅한 의료 시설이 없어서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래서 네팔정부에서도 의사들을 파견하고...그러던 중 한인교회도 이번 기회에 그곳으로 의료캠프를 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후원금을 내고 떠날 사람들이 결정되었다.
더이렉은 중서부개발구역의 중심도시 수르켓에서 다시 차를 타고 6시간 이상을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걸어서 다시 하루 이틀을 가게 될 것이다.
물론 아주 심한 지역은 걸어서 다시 3~4일을 가야했지만 시간적으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을 멀리 잡지는 못했다.
늘 그렇듯이 험한 지형과 시간적인 제약이 전도사역과 의료사역의 최대의 난관이다.
코이카 의사선생님 2분 간호사 2분 방사선과 1분과 통역과 전체진행을 위해서 선교사님들이 동행을 했다.
일부는 네팔간즈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고, 나머지 분들은 비행기로 이동을 해서 오셨다.
밤새 나이트버스를 탄 팀과 비행기팀이 만났다.
더이렉을 가 본 유일한 사람이 나였기에 전체적인 일정과 차량섭외 등은 내가 맡게 되었다.
네팔간즈에서 수르켓까지는 길이 좋아서 잘 이동했다.
수르켓에서 더일렉까지는 거리는 멀지 않지만 포장이 되지 않아서 우리 앞에 있던 트럭이 멈추어섰다.
트럭을 함께 밀면서 빼기 위해 고생에 고생...
지금은 이 길이 포장이 되어서 카트만두에서 바로 가는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던 때가 여성의 날인 띠즈가 있는 날이라서 동네여자들이 옷을 차려있고, 사원으로 가는 중이다.
이곳에 도착해서 바로 의료캠프를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군청병원과 군청과의 협조 문제로 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어디로 갈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이틀동안 교회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그동안 서로 기도하고, 안식하고,
마음을 비우는 일은 선교를 하면서 꼭 필요하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바라보는 것...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결국 허락이 떨어지고 걸어서 하룻길과 걸어서 이틀길의 마을로 의료캠프를 떠났다.
의료진과 도우미 모두 두 팀으로 나눠어 가게 되었다.
우리팀은 하루 더 걸어가야 하는 곳으로 길을 가게 되었다.
카트만두에서 준비해 온 약품들은 마을 아낙네들이 포터 역할을 하면서 날라 주었다.
가는 길에 찍은 우리 조.
선교사님, 단기 선교사, 방사선과, 의사선생님, 교회성도...
간밤에 잠을 잔 숙소 앞에서 찍은 사진. 이미 부시시해 진 모습들.
산사태가 나서 걸어가기 힘든 길들을 중간 중간 만나게 된다.
그래도 이쪽 지역은 아주 험한 지역이라고 하기는 힘든 것 같다.(지금 돌아보면)
이런 이런 누가 영어를 잘못 적었네요. 그래서 살짝 가리고 찍은 사진.
통역과 약품팀 그리고 진행요원을 배치하고 선교사님과 함께 마을을 돌면서 땅밟기를 했다.
첫 날 진료한 장소에 온 마을 주민들.
부실한 식사를 생각해서 점심에는 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갔다.
너무나 아름다운 마을의 모습.
하지만 식수로 먹는 물이 곳곳에 있는 인변, 소 똥 등으로 더러워져서 질병의 염려가 있는 곳이다.
우리를 도왔던 보건소직원.
두 번째 날 찾아온 아저씨의 다리.
어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다친 다리를 고치지 못해 평생 저렇게 사신다니...
낫으로 나무를 베다가 다친 소년.
약만 발랐어도 금방 나았을 소년. 군청에 있는 병원으로 갈 수 있도록 후원했다.
이 지방의 사두(제사장이나 수련승)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인 것을 알지만 아픈 상처를 보여주면서 약을 받으려고 하고 있다.
모든 일을 끝내고 이틀 동안 머물렀던 숙소 앞에서 ...
내려가는 길에...진료. 이 아주머니는 유방암 말기라서 우리가 해 줄 것은 영양제와 기도 밖에는 없었다.
신앙이 있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주머니를 위해서 영접기도를 했다.
더 이상 질병과 고통이 없는 나라에서 꼭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의사 선생님의 빈대자욱.
온 몸에 200번도 넘게 물렸던 자욱. 생각만 해도 근질근질하다.
이렇게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도 순탄치 않다.
하지만 한인교회처음으로 함께 떠난 의료캠프였다는 것이 참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