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다고 해서...
따로 글을 올리겠지만 이번에 희진이의 출생신고와 여권을 만들면서 마음이 조금 상했습니다.
올 3월부터 재외국민에게도 양육수당이 나온다고 정책이 발표되었습니다.
이게 웬 횡재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런데 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는군요.(법이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조차 알기 힘들더군요)
그 이유로 양육수당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권도 단수여권만 만들 수 있답니다.
참 불합리한 정책이고, 행정편의의 발상입니다.
그런데 잘만 속이면 출생신고도 하고, 주민등록번호도 받고, 여권도 만드는 방법이 있더군요. 물론 불법이고, 문제가 발생하면 고발도 당한다더군요. 하하. 그런데...법이 어떤 부분에서는 허술하고 불합리하고 편법이 통하는 상황이라는 것이 더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아니면 명확하지 않아서 의구심이 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잘 했나 못햇나 고민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명확했습니다.
조금의 이익을 위해서 불법을 행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모스에는 지혜자가 잠잠하는 그 때가 바로 악한 때라고 합니다.
"그래 그 정도는 다 하는거잖아.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시대.
5장 14절에서는 너희가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24절에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마르지 않는 강.
네팔에는 겨울이면 말라버리는 강이 많습니다. 비가 오면 사람이 건너기도 힘든 넓은 강이 되지만 비가 그치고 시간이 지나면 바닥을 드러냅니다.
더 이상 공의가 통하지 않는 것 같은 때에도 공의를 마르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호등 앞에서 기다릴 줄 아는 마음.
아무리 바빠도 새치기 하지 않는 것.
편법이 보여도 정도로만 가는 삶.
제가 그렇게 산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 봅니다.
억울하다고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길을 간다면 정의와 공의의 강은 말라 버릴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망하는 것입니다.
조금은 억울 했습니다.
받을 수 있는 돈을 강탈 당한 것 같았습니다.
외국에 사는 것도 힘든데, 국민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면 안 되겠지요.
눈금을 속이는 저울추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쌓은 부와 명예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영원 나라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네팔에 살면서 왜 이리 억울하고 분이 많은지 고민해 봤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정직하게 살아도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더 잘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기는 분냄이었습니다.
그런데...그렇게 억울하다고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과 다르게 사는 것을 보여주러 왔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은 늘 스트레스와의 전쟁입니다.
뭐가 그리 억울한 일이 많은지?
택시를 타도 늘 속는 것 같아서 억울하고, 외국인이라고 속는 것 같아서 억울하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정세가 열 받고, 막히는 도로, 제대로 되지 않는 행정처리, 늘 변하지 않는 현지인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시면서 얼마나 속상하실까요. 정의와 공의가 메말라버린 저의 마음 상태를 보시면서...
정의와 공의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나에게 대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정의로와지고 공의롭게 될 것 같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정리하는 것은 굉장히 방대한 내용이라 여기서는 줄입니다.
내 이웃을 어떻게? 내 몸과 같이...이것이 바로 사랑이자 공의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자신의 몸을 주시면서 억울해 하지 않으셔서 참 감사합니다.
"내가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들을 위해서 죽는단 말야"라고 말씀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나 억울 하셨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편에서 생각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 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입니다.
공정한 법의 심판도 받아 보지 못하시고, 단지 시기심에 희생되신 그분.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답니다.
억울하다고 십자가를 벗어던지지 않으셔서 참 감사합니다.
조금 억울한 것 같아도 그래서 저도 한국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하하
상대방이 나에게 뭔가를 주었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도 조건적인 사랑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정의와 공의가 넘치는 사랑을 할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억울할 때 하늘을 바라보시고 가슴을 펴고 심호흡 한번 해 보세요.
그리고 우리를 위해 억울해 하지 않고 기꺼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 봅시다.
그럼 세상에 억울할 일이 조금은 사라져 가지 않을까요?
성경에서는 세상이 점점 악해져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 마르지 않는 정의와 공의의 강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멸망해 가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애타게 외쳤던 아모스의 마음이 우리 삶에서 읽어졌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