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따라잡기1
사순절 기간을 맞아 새벽예배 설교를 한인교회에서 이틀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틀간 나눈 말씀을 올려 봅니다.
요한 7장 1~9절
빠름보다 바름, 오름보다 옳음, 많음보다 맞음
453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형제들이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명절에 올라가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올림픽정신이 있습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Citius-Altius-Fortius’
그걸 요즘 우리의 삶에 비추어 바꾸면,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한국 사람들을 표현하는 단어 “빨리” 뭐가 그리 급할까요?
형제들이 말합니다. 빨리 자신을 드러내라고.. 예수님께서 말하십니다. “내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제가 좋아하는 메이저리그 투수가 있습니다. 커쇼입니다. 그의 구속은 150km 중반대로 최고의 강속구 투수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직구와 커버의 속도차이가 30킬로나 나서 그 분야 최고입니다. 사이영상을 이미 3차례나 받았습니다. 또한 제구력이 엄청나서 우주최강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그가 인정 받는 것은 선교사자녀이며, 고등학교 여친과 결혼을 했고 비시즌에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그의 삶 때문입니다. 야구선수로 훌륭한데 인품까지 훌륭하니 좋아하는 선수가 아닌 존경 받는 선수가 된 것입니다. 제구가 되지 않는 속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육상에서 아무리 빨리 달려도 먼저 출발을 하면 실격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라인을 밟으면 실격입니다. 수영에서는 한 차례 실수로 바로 실격을 당합니다. 세상의 법도 이같이 지키지 않으면 탈락을 하듯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경주를 할 때 법을 지키면서 일해야 합니다.
아무리 빠른 차도 브레이크가 좋지 않으면 속도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열정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빨리 달리는 차일수록 브레이크가 좋아야 합니다. 또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제어장치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 빨리 이루려고 하는 조바심처럼 위험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남들은 다 출발해서 저 멀리 있는 것 같아서 조바심이 납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하면 속도가 날 것 같습니다. 그럴 때가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빠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른 방법으로 일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린 물어야 합니다. 빨리 가고 있느냐가 아닌 바른 길로 정직하게 가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느냐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빠른 방법이 아닌 바른 방법으로 일하셨습니다. 그 길이 아무리 빨라도 방법적으로 바르지 않으면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더 높이를 좋아합니다. 높은 곳에 오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말합니다. 이 시골 말고 유대로 올라가자고
왜 가자는 걸까요? 그것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죄 된 본성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르려 하셨던 곳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나 높은 지위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뭘 할지에 대한 올바른 준비를 하지 않아서 사고를 냅니다. 높은 곳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높은 곳에 있어서 주위의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립니다.
남들이 오르지 못한 높은 곳에 올라가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경쟁입니다.
1위, 1등, 금메달만 알아주는 세상입니다. 동메달 20개보다 금메달 하나가 더 높은 대우를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셈법은 다릅니다. 5달란트 받은 이와 2달란트 받은 이를 동일하게 대우하셨고, 9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오후 5시에 온 사람이나 동일한 품삯을 주셨습니다. 가진 양이 아니라 그 마음을 하나님을 보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말합니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그렇게 살려고 했던 선교사지만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고 누군가가 알아줍니다. 여러 매체와 인터넷이 우리의 삶과 사역을 사람들에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쭐해 하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마음. 하지만 예수님은 오름이 아닌 옳음을 따랐던 분입니다.
이 일이 나를 높은 곳으로 오르게 하는 길인지가 아닌 정말 올바른 길인지를 물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르는 것은 우리가 높임을 받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높임을 받으시게 되기 위함을 잊어버리는 순간, 목표가 없이 오르는 데만 열중할 때 우리는 방향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군대에서 영점사격을 합니다. 탄착군이 형성되지 않으면 총의 영점을 잡지 못합니다. 어디를 향해 사역하는지 알아야 결과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빌 2:7~11에서는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이시지만 그 형체를 비워 종이 되시고,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를 모든 이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이 그에게 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높아지려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낮아지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위에 많은 일들이 사람들이 우리를 높이려 할 때,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것 오름이 중요하지 않고,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지 옳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3. 형제들은 명절에 올라가자고 말합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라고 외칩니다. 늘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자랑하고, 더 많은 것을 가졌으면 우쭐댑니다.
그건 삶에서 사역에서 늘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남들이 더 많이 가진 것 같으면 부럽고, 나도 더 가지고 싶고, 사역도 그 내용보다 양에 어느새 집중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에게 유대로 올라가서 많은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5000명의 군중을 먹이고 그들이 왕으로 삼으러 하자 그들을 떠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5000명의 왕이 아닌 한 잃어버린 양의 목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늘 주님은 많은 것이 아닌 작고 연약하고 적은 것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모든 부자의 헌금보다 두 렙돈의 과부의 헌금에 더 가치를 두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사역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지에 참 많이 열중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 비교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많음이 아닌 맞음이었습니다. 많이 드림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진 것,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분주하고 바쁜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리아는 더 좋은 것을 찾았다”라고 말하십니다. 라면에 김치 하나로도 족하다. 이라 와서 나의 말씀을 들으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손님 초대를 하고는 상차림에 분주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마음 깊은 교제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말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결정하지 못하면 많은 것에 현혹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본질이 없는 형식은 죽은 것입니다. 질소덩어리의 과자봉지에 우리가 실망하듯이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도 실망하실 수 있습니다.
빠름보다 바름, 오름보다 옳음, 많음보다 맞음(마음에 합한)을 추구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때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빠르게 가는 방법을 찾고, 오르려고 노력하고, 많은 것에 현혹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셨던 참 제사를 드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때를 구분하는 것은 빠른 방법보다 바른 방법을 추구할 때, 올라가는 방향보다 올바른 방향을 추구할 때, 많이 드림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을 드릴 때 알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온 때야 말로 나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