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의 여행과 글

지니의 한인교회 주일예배설교(1월 15일)

지니와 유니 2012. 1. 16. 12:52

1월 15일 주일예배 때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작성한 설교문을 올립니다.

 

세례요한을 통한 나의 삶 비추기(행복한 삶 살기 프로젝트)

 

행복하십니까? 사람들은 늘 행복을 꿈꿉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워도 나의 자녀들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어릴 때 다 돌아가시고, 어느 날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수 많은 나날을 어릴 때 받은 사명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사람들 앞에 나타납니다. 거친 소리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칩니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리고 체포되어서 목 잘림 당한 채 죽고 맙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면. 아니 여러분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면 행복하시겠습니까? 이 길을 걸어가자고 말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표현했던 사람. 하지만 사람들이 따라가기에는 조금 힘든 삶을 살았던, 그래서 아브라함, 요셉, 다윗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 세례요한, 존경은 하지만 그렇게 살기를 많은 이들이 꺼려하게 되는 사람, 물질적 복과 성공이 행복의 척도가 되는 세대에 어울리지 않는 외로운 외침 세례요한.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오늘 저는 세례 요한의 삶을 돌아보면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려고 합니다.

 

 그에게는 부모님도 안 계십니다. 처자식도 없습니다. 집도 없고, 노후대책도 없습니다. 약대털옷 하나에 꿀과 메뚜기가 먹거리의 전부입니다. 가진 것 아무 것도 없는 그에게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헬렌겔러는 장애가 살아가는데 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보기에 부족해 보여도 정말 가져야 할 것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불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1.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

 

첫 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고, 성령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말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말라기 이후 침묵의 시기를 깨고 성령님이 세례요한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립니다. 성령님의 계시로 태어난 아이, 뱃속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주님을 경배하는 아이,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만 천하에 알린 바로 그가 요한입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님을 눈으로 직접 보았던 이가 바로 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성경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에녹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과 평생 동행하다가 살아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성경에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세대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일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그 후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들림을 받습니다. 365, 365일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무엇을 했느냐 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만 결혼이 더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자녀를 잘 못 만나서, 친구를 잘 못 만나서, 스승을 잘 못 만나서…… 수 많은 잘못된 만남으로 불행해집니다.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만남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지금 성령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나의 삶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황금보다 더 귀한 것이 지금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잘 나갔는데, 언젠가는 잘 되겠지.가 아닌 지금 바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내일은 영원히 내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바로 지금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전에 만난 성령님이 아니라, 앞으로 만나게 될 성령님이 아니라 바로 지금 성령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의 사람 세례 요한도 고민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과연 그가 기다려왔던 그리스도가 맞는지 회의가 왔습니다.

그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사람들을 보내서 그의 의심을 해결하려 합니다. 그 때 성령님이 알려 주셨으니 맞겠지.라고 요한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의심을 그대로 인정하고 다시 한번 지금 믿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확신을 가지려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이 믿기지 않는데, 사람들이 좋아서, 그래도 종교는 있어야 될 것 같아서 교회를 오고 계신가요? 언제가 성령님을 만난 것 같은데 지금은 애매모호해 지셨나요? 누구를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오고 계십니까?

구원도 천국에 대한 소망도 흐릿해지셨나요? 네팔에 올 때 가졌던 그 뜨거움이 지금은 식어지셨나요? 뭔가 될 줄 알았는데 자꾸 실패 하다 보니 이제는 포기하게 되시나요? 지금 다시 성령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내가 날마다 죽고 날마다 구원을 이루고 날마다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계신가요? 뜨거운 성령체험을 경험해 보지 못하셨나요? 도전합니다. 지금 성령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만났던 성령님, 언젠가 만나지겠지 막연한 기대감으로 바라보는 성령님이 아닌 지금 성령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불 같은 음성으로 외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이 너무나 가까이에 있습니다.

 

 지금 빔 프로젝트가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배가 안 되나요? 마이크는요? 강대상은요? 의자는요? 식당은요? 주차장은요? 이 건물은요? 설교자는요? 찬양단은요? 이 모든 것이 없어도 예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이곳에 와 계신다면 말입니다. 그것 외에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신경을 빼앗기고 있습니까?

 멋진 침대보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는 숙면의 은혜가, 맛난 음식보다 아무것이나 잘 먹는 식성이, 잘 나가는 차보다 잘 걷는 다리가, 두꺼운 오리털파카보다 이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체력이 더 중요하듯이, 교회는 성령님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교회를 운영하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살게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현지인 교회의 생명력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바랄 것이 성령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성령님만 의지합니다. 먼 길을 걸어야 하고, 발 냄새가 풍기고, 춥고 어둡고 좁은 방이지만 성령님이 계시기에 충분합니다. 찬양곡조가 틀리고, 설교자의 말씀이 부족해도, 그들은 주님을 만나는 감격으로 훌륭한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에게 그 열정을 빼앗고, 좋은 시스템과 성경교재, 재정적인 후원, 번듯한 건물을 주기 원하십니까? 그들에게서 그 열정과 성령님에 대한 사랑을 뺏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 보았던 요한,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했던 사나이, 자신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꾼 사람 요한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설교를 준비하면서 보게 된 동영상을 하나 소개합니다. (인터넷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치면 나오는 감동적인 동영상이 있습니다)

 

동영상 본 후) 여러분은 이런 아버지가 있습니까? 나의 뒤에서 나를 밀어주고 계시는 아버지, 그분만 계시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버지,

아버지가 없었으면 할 수 없었어요 아들아 내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령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자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성령님을 임재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2.      두 번째, 자신의 사명을 알고 가는 삶은 행복합니다.

 동영상에서 본 것 같이, 딕과 릭에게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그 때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리고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였습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아는 삶보다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명확히 아는 삶처럼 행복한 삶이 과연 있을까요?

그 사명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마저 아깝지 않게 바칠 수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몇 년 전부터 꿈꾸었던 75개 질라를 다 도는 일이 올 5월 정도면 끝날 것입니다.

작년부터 시작한 동서횡단전도여행이 앞으로 3번의 여행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신학교와 지방교회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사역을 시작할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네팔에서의 최종의 꿈은 네팔에 있는 4000여 개의 지역을 다 다녀보는 것이고, 4000개의 동네에 교회가 하나씩은 세워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고, 그 일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옵니다.

 

요즘 지방을 다니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교회들을 많이 만납니다. 가정교회와 지 교회로 동네마다 성소들이 세워져 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꿈이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하고 계십니까? 평생을 가지고 가는 사명이 무엇입니까?

 

요한의 사명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그 부모님을 통해 들었던 넌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야.라고 하는 소리가 듣기 싫지는 않았을까요? 나는 왜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가 될 수 없는 거야. 원망은 없었을까요? 하지만 그는 광야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신의 사명을 명확히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네팔 땅에서의 사명은 무엇이십니까? 나는 선교사가 아닌데, 난 그냥 음식점을 하는 사람이야, 난 대사관직원일 뿐인데, 난 코이카로 봉사만 하면 돼. 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여러분 개인 개인을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특별한 사명을 주실 것입니다. 사명이 없는 성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그 사명을 만나지 못하셨다면 광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왜 사는지 모른 채 나이만 들어간다면, 왜 사는지 모른 채 시간만 보낸다면,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모른 채 최후를 맞이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까? 세례요한과 같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걸만한 사명을 찾으십시오. 그렇다면 우리의 가는 걸음이 한결 가벼워 질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고통스럽기만 하셨을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어쩌면 십자가에서 웃으셨을지 모른다고요.

주님이 고통스럽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고통을 뛰어넘는 기쁨을 누리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취감, 목표의식, 결전을 마친 장수의 외침입니다. 결승선을 통과하고 가쁜 숨을 몰아 쉬는 마라토너의 환희입니다. 고통스럽지만 행복합니다. 눈물이 나지만 기쁩니다. 힘겨워 얼굴이 일그러지지만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바울도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라고 말합니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고,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있다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요한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갈 길을 알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 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은 30킬로까지 1시간대에 주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42.195킬로미터를 끝까지 완주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일생 동안 울부짖는 사자로 살아야 했던 외로운 야성 세례요한. 그는 자신의 생이 끝나는 순간, 자신이 그렇게 기다렸던 주님, 그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신의 삶에 가슴 벅찼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3.      세 번째, 나의 자리를 내어 줄 사람이 있다면 행복해 집니다.

 

사도행전을 살펴보며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뀌는 장면에 바나바라는 인물이 함께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의 호칭이 바나바와 사울, 바나나와 바울, 바울과 바나나로 변해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을 바울 되게 하고 자신의 자리까지 내어준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이 네팔 땅에서 조금 더 행복해 지지 않을까요? 네팔 땅을 떠날 때에 기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러날 때와 물러주어야 할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 실패한 사울 왕의 모습을 보면 우리의 모습이 보여서 연민이 느껴집니다.

어떤 때는 질투 때문에 어떤 때는 걱정 때문에 그 자리를 잘 비켜주지 못합니다.

빨리 현지인들이 성장하면 우리는 다 떠나야죠.라고 말하지만 그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 주기가 아깝습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10년을 같이 있어도 변화된 것 같지 않은 삶의 태도, 가치관, 한숨이 나오는 상황들 하지만 이 땅에서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네팔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도 19살에 부모님을 떠나서 자취를 하며 신학대학을 다니고, 군대를 가고,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그 나이가 되어서 학교를 가고, 군대를 가고, 결혼을 하고, 사역을 하면 어찌 그리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지 그것이 다 부모의 마음 같습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를 떠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또 다른 부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정적인 독립, 정서적인 독립, 자신만의 사명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헬리맘이라고 다 자란 자녀에게까지 간섭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나이는 들었지만 자라지 못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그 자리를 잘 비켜주지 못하는 우리와 달리 세례요한의 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기도 전에 나는 그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요단강에서 만나고 그를 세상에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는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께 가자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기다렸던 분,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자리를 내어주어도 되는 사람을 만난 기쁨을 누렸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나이가 거의 비슷하고. (6개월 차이) 탄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찾아오시고 잉태되기에는 육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잉태가 됩니다.

사막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회개와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머무는 곳도 없이 떠돌아 다녔습니다. 배고프고 헐 벗은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고, 한 때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아로 추앙 받았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합니다. (목 베임과 십자가형)

 

그런데 그들에게 사소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광야에 살면서 부실한 식사를 견디어야 하면서 수련을 거치지만 예수님은 40일 금식 이후에 바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금식과 기도를 하는 요한의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는 것을 탐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요한은 대제사장의 아들이었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어쩌면 모든 면에서 메시아의 면모를 더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요한과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갈릴리 시골 출신의 나사렛 예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메시아의 자리는 자신의 자리가 아님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그 자리를 내어 놓습니다.

 지방을 다니며 그 자리에서 열심히 신앙을 지키는 성도의 삶을 보면서 아 이들이 있어서 네팔이 쓰러지지 않는구나 하는 위로를 받습니다. 나보다 더 나은 그들을 보면서 감사가 넘칩니다.

 

나를 통해 다윗이 나올 수 있다면, 나를 통해 바울이 나올 수 있다면, 나를 통해 예수님이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마저 아직도 부족한 제자들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자리를 비워주십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자신이 다윗이 되기를 자신이 바울이 되기를 자신이 예수님이 되기를 원합니다.

코미디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2등도 3등도, 1등을 위해 기꺼이 꼴찌를 할 수 있는 사람도 모두 기억하십니다.

 실패하고 실망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고 떠날 수 있는 행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팔을 사랑하는 여러분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나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들은 흥하여야 할 것이고, 우리는 쇠하여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보면서 행복공식을 생각해봅니다.

지금 늘 성령님을 만나고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자리를 내어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누리는 2012년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