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일명 다윗의 성으로 불렸던 이스라엘의 수도.
하지만 국제법상으로는 어느 나라의 땅도 아닌 곳.
이름의 뜻은 예루; 도시 살렘: 평화 그래서 평화의 도시이지만 평화는 존재하지 않은 분쟁과 불안의 땅.
예수님의 바라보시면서 슬퍼하셨던 곳.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했던 땅.
샬롬의 도시인데 샬롬이 없는 운명.
부부인데 사랑이 없고, 학생인데 공부할 의지가 없고, 노인인데 지혜롭지 못하고, 젊은이인데 열정이 없고, 군인인데 나라사랑이 없고......
앙고 없는 팥빵.
뭔가 기대를 잔뜩하게 하고는 결국 본질이 없는 삶.
몇 일전에 왜 굳이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직접 쉬셨던(하나님이 피곤하셔서 쉬신 것이 아니다) 날이다.
그리고는 직접 인간에게 쉬라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은 정말 쉬는 날이다. 그리고 예배하는 날이다. 그리고 회복되는 날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자신들이 만든 그리고 자신들이 상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규범을 만든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지킨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곁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간다.
그런데 뭔 이유에서인지(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는 율법에 의한 이유일수도 있습니다만) 그를 지나가 버린다.
우리가 상상했던 종교인의 모습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안식일에 굳이 병든자를 고치고, 제자들이 밀을 까불려 먹는 것을 모른 척하시고, 문둥병자와 같은 부정한 사람을 만지고, 시체에 손을 대고,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고, 여자들과 식사를 하고,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는 사람을 제자로 두고, 창기와 세리들과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의 눈에 예수님은 도저히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깰 수 있단 말인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분명 예언처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예수님은 나사렛사람이라는 명칭을 베들레헴사람이라고 바꾸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은 그들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데, 오늘 설교(시카고한인교회 서창권목사님)에서 안식일과 샬롬에 대한 설교를 하셨다.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는 샬롬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라는 주제였다.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천국에서 어떻게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
만성피로와 대인기피, 일에 대한 부담감, 짜증나는 말투와 행동, 화를 억제하지 못함,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
선교사들이 일명 말하는 번아웃.
번아웃 신드롬을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로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정서적인 극도의 피로로 무기력증이나 자기혐오·직무거부 등에 빠지는 증후군. 카리스마적이고 정열적이며 이상이 높고 일에 전력을 다해 달려드는 사람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뭔지도 몰랐던 우리가 이제 모두 번아웃이 되어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어서 장작이 남아 있는 줄 알았더니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사이에 하얀 재만 남은 상태.
그래서 아무리 들쑤셔서 불길은 올라오지 않는 상태.
많은 사람들은 배가 고프면 먹고, 주유경고등에 불이 들어오면 잽싸게 주유를 하고, 잠이 오면 자고, 피곤하면 쉰다.
하지만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휴가를 가서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늘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나는 과연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
나의 자리에 맞는 열정과 사명을 가지고 있는가?
열정은 없는데 일에는 치여 사는가?
나에게 필요한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요즘 많은 일과 여러 가지 불안요소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각하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그것들이 꼭 나를 괴롭히는 일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받아 들이는 나의 자세와 반응이 변했을 뿐이다.
군대의 유격장에서 너무 재밌어서 웃다가 고참들에게 혼났던 때가 있다.
유격장에서 하는 훈련이 난 참 재밌었다. 외줄타기를 하고, 절벽을 뛰어 내리고.
사회에서는 돈주고 해야 할 것을 안전요원이 잘 지켜주는 가운데 할 수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잘못되었고, 유격장에서는 힘들어 해야 하는 것이었을까?
네팔에서 참 힘든 시기를 지냈다.
돌아보면 그 때는 지금보다 참 젊었다. 그래서 힘든 줄 몰랐다. 아니 도리어 재밌었다.
데모대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것도 신났고, 축제들을 쫒아 다니는 것도 신났고, 오지에 오지를 찾아 다니는 것도 신났다.
벼룩에 물려도 신났고,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었어도 몇 일이 지나면 다시 길을 떠났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젊다.
하지만 그런 시절이 쌓이고 쌓이고 사역에 대한 부담이 늘어가고, 지켜야 하는 가족이 늘어가고 그래서 점점 신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때는 팀들을 데리고 레프팅도 참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한 일이다.
단기선교팀을 데리고 어찌보면 참 위험한 레프팅이라니.
사역지가 바뀌고 팀들의 색깔도 바뀌면서 팀들과 레프팅을 안 한지 몇 년이 되었다.
이제는 도리어 하자고 할까봐 걱정이 된다. 왜냐면 만에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나이가 되어서인가 보다.
교인 수련회를 가면 이 재밌는 물놀이를 왜 자꾸 하지 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아이들에게 뭔 하지 말고 뭔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지금은 두려운 것이 많다.
나이가 들면 노파심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어쩌지 저렇게 되면 어쩌지.
그것이 연륜이고 안전한 길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편한 길, 남들이 다 가는 길, 남들이 보면 폼 나는 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다시 필요한 것은 바로 열정인 것 같다.
그리고 고난 속에도 넘쳤던 여유인 것 같다.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그렇게 샬롬 속으로 돌아가려 한다.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기에 마른 장작 몇 개 다시 집어 넣는 쉼을 가지고 다시 불을 지펴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보다 우리가 어떤지에 관심을 가지신다.
밀밭에서 밀을 베어먹던 제자를 보면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말하는 율법주의가 바리새인이 아니라
얼마나 배가 고플까, 그래 나 따라 다닌다고 고생이 많다. 안식일이니 오늘 너희의 필요를 채워라 하시면서 다윗의 예화까지 꺼집어 내어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다.
나는 안식일을 지켰나보다 지금 배고픈 제자들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시선을 맞추고 계신다.
혹시 번아웃 상태인 분들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쉬세요.
잠시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안식하시고 다시 힘을 얻어 화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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