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성경묵상

고난이 은혜 되게 하는 길(주일설교)

지니와 유니 2016. 7. 26. 12:46

한인교회에서 주일설교를 부탁받아 준비한 원고입니다.


고난이 은혜 되게 하는 길.docx


요즘 네팔의 상황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고난의 시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름답게 역사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내용)))

 

고난이 은혜 되게 하는 길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고난과 은혜는 함께 하기에는 어려운 단어 같지만 실제로는 두 단어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아주 친밀한 단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난 고생해도 괜찮지만 우리의 자녀들은 고생이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고난이 없는 것이 꼭 은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고민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의 삶에 고난이 있었기에 그들의 삶에 믿음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처럼 고난은 우리 인생에서 참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럼 근심과 고난이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그것이 은혜가 되게 하는 길이 무엇일까요?


  1. 첫 번째, 고난이 은혜 되게 하는 방법은 고난이 유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대체 왜 유익할까요?

 우리의 삶을 흔들어주는 바람은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며, 우리 내면 깊은 곳을 흔들어 줍니다.

평소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고난 앞에서 믿음이 드러나고, 더 강해집니다.


 지구가 빠른 속도로 멸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태풍이 안 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도인근은 온도가 계속 올라가고, 극지방은 계속 추워지게 됩니다. 또한 바다의 깊은 곳까지 휘저어지지 않아서 플랑크톤이 죽어가고 전체 생태계가 혼란에 빠집니다. 또한 많은 곳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극심한 가뭄에 빠지게 됩니다.

한 때 태풍의 피해로 인해 태풍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하는 실험을 했지만 태풍의 피해보다 유익이 많다는 것을 안 후부터는 그런 시도를 하는 기상학자는 없다고 합니다.


네팔의 우기철이 되었습니다. 비가 참 많이 내렸습니다. 산사태가 나서 죽은 사람도 많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피해보다는 유익이 크기에 우기철의 비는 반가운 존재입니다. 모내기를 하게 하고, 일년 내내 먹을 식수를 제공해 주고, 전기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삶을 기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저주가 아닌 은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왜 유익이 될 수 있을까요?

 적당한 긴장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피아노의 장력은 줄 하나에 보통 60~120킬로를 지탱시키고, 피아노 하나에 16톤에서 20톤의 긴장이 늘 주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런 긴장감이지만 이 긴장이 없으면 피아노는 피아노로써의 기능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너무 지나치게 긴장하는 것은 건강에 나쁘지만 더 위험한 것은 무기력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적당히 긴장하고 고민하고 그것을 대비해 준비를 하는 것은 인생에서 참 중요한 지혜입니다.


바이올린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은 각 현이 내어야 하는 소리를 정확히 낼 수 있도록 조율을 한 다음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도 조율이 되지 않은 악기로 연주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우리를 연주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조율하시는 것입니다.


높은 소리를 내어야 하는 악기는 더 많은 긴장을 주어야 합니다. 타악기처럼 모두 한 가지 소리만을 내면 오케스트라합주와 성가대의 합창이 불가능하듯, 우리에게 적당한 고난과 긴장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울리게 하는 조율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과 의견 대립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고 힘들어 하지만, 의견 대립이 없는 것보다 무관심 한 것이 더 문제입니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한번씩 조율하고 양보해 가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이 없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부부싸움을 어떻게 하고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처럼 고난 자체보다 그 고난을 어떻게 이길 것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선배들에게 선교지의 선배들에게 신앙의 선배들에게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수 많은 갈등의 순간과 고난의 순간을 그들이 거쳐 왔기 때문입니다.


그늘에서만 말린 그릇보다, 햇볕에만 말린 그릇보다, 7, 800도의 초벌구이보다 1300도 이상의 재벌구이를 한 도자기가 찬란하듯이, 정금이 되기 위해서 연단을 받듯이, 명검이 되기 위해서 수 없이 두들겨 맞듯이 그 당시는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이 어떤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낼지를 기대한다면 고난은 시험이 아닌 주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될 것입니다.


네팔의 현실이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네팔의 교회는 더 강해질 것이고, 알곡신자들이 교회를 채우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고난이 저희에게는 자랑이 될 것입니다.


마오이스트의 내전을 거쳐왔다는 것이, 힌두왕국의 시기를 거쳐 왔다는 것이, 네팔대지진을 거쳐 왔다는 것이 그 때는 고난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자랑의 면류관이 되었듯이 지금의 상황들이 더 아름다운 자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상황이 두렵기도 하지만 가슴이 뛰는 설렘을 주기도 합니다.


2.두 번째 고난은 우리의 평범한 삶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이라는 것이 참 신나는 일이고,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는 참 좋은 수단이 됩니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지면 집이 참 그립습니다.


단기팀이 오면 하는 이야기들이 거의 같습니다. 물이 이렇게 소중한지, 전기가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다. 한국 음식이 참 맛있구나. 난방과 냉방이 안 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구나.

평상시에 너무 쉽게 얻는 것이기에 그것이 은혜인 줄 모르는 것이 실제로는 참 큰 은혜임을 알게 되는 것이 선교여행입니다.

파랑새라는 책에서 결국 그 파랑새는 바로 내 옆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무지함 때문입니다.


매일 매 순간 주어지는 은혜들을 찾아서 누릴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 같은데, 사람은 참 간사해서 매일 익숙하게 주어지는 것들을 은혜로 누리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삶에 무디어 있을 때 그 평범한 것이 바로 아주 큰 은혜였음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고난의 순작용입니다.

 

바로 가까이 있는 히말라야의 트레킹만 가도 참 많은 것들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특별한 것이 아닌 그냥 평상시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쌀이 되기까지 88(여든 여덟)번의 손길이 간답니다. 88을 한자로 적으면 쌀미자가 됩니다. 그 귀한 쌀로 오늘도 밥을 먹고 왔네요. 누군가 생수를 날라주고, 누군가 가스와 석유를 배달해주고, 해와 비가 적당한 때에 찾아와 줍니다.


해도 비도 공기도, 심장이 뛰는 것도, 소화가 되는 것도, 잠이 오는 것도, 무언가는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만지고 걷고 하는 모든 것이 공짜입니다. 공짜 아닌 것보다 공짜인 것이 훨씬 많고 그것들이 더 소중한데도 그것의 은혜를 잊고 사는 우리에게 고난은 그 은혜를 기억하게 만드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나의 수고가 아닌 누군가가 선물로 준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닌 선물로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게 됩니다. 하지만 고난의 순간이 오면 그 평범했던 것이 모두 은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간혹 찾아오는 고난의 뒷면에는 은혜라는 단어가 함께 써 있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왜 고난이 오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난을 이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고난이 오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주님이 은혜와 진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의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기에 이 세상을 살면서 성도들은 고난을 받게 됩니다. 욥이 고난을 받은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다면 받지 않았을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과 타협했다면 십자가의 고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불의와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고난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으로 뛰어 드는 것입니다.


벧전 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진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지만 또한 고난을 줄 것입니다.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쉼을 줄 테니 오라고 하신 그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분 앞으로 나아가면 참 자유도 있고, 참 고난도 있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왜 예수님을 떠나고 신앙생활에서 낙망을 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믿으면 받게 될 상급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와 함께 받아야 할 고난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기 힘든 게 정상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등 돌림 당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람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때로는 손가락질 받고, 고난 당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주님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표입니다.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셨고, 그래서 우리가 시험 당할 때 능히 도우실 것입니다.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이런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그 고난조차 뛰어 넘는 영력을 키워야 합니다.


유아는 한발자국을 떼기 위해서 2000번 정도의 넘어짐을 겪는다고 합니다.


사람처럼 느리게 기고, 걷고, 뛰는 존재는 없는 듯합니다.


뒤집는데, 기는데, 일어서는데, 걷는데, 뛰는데 몇 개월씩이 걸립니다.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칩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이 없이는 어른으로 자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단기팀들이 오면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날씨를 위해서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날씨가 좋기 보다는 어떤 날씨에도 그 날씨를 즐길 수 있는 단기여행이 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날씨가 좋으면 은혜입니다. 하지만 날씨가 안 좋은 것도 주님의 뜻이고, 때로는 날씨가 안 좋은 것이 더 큰 은혜일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더 이상 고난이 되지 않을 때 이미 그는 영적인 어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뛰어 넘는 영력이 있으면 문제는 쉬워집니다. 독수리는 10미터, 100미터 담장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인생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늘 비슷한 고민을 하고 늘 시험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지고 넘어지고 하다가 언젠가 일어서고 걷고 뛰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아니 독수리 날개침 같이 날아오를 날이 올 것입니다.



스리랑카에 컨퍼런스로 작년에 갔었습니다. 바다가 정말 예뻤습니다. 완만한 모래사장에 적당한 파도, 물고기가 보이는 맑은 물, 정말 좋았습니다.

아이들과 보드를 하나 빌려서 함께 하루 종일 놀았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더 큰 파도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큰 파도에서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렇듯 한계를 뛰어 넘는 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는 믿는 우리가 군사와 경기하는 선수와 같다고 비유를 합니다. 군사와 운동선수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보통 사람보다 훈련을 강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전에서 그것에 대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나와 남의 목숨을 살리고, 모든 순간이 끝난 후에 훈장과 메달을 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을 훈련처럼 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평상시에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사람만이 기쁨으로 단을 거두고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햇볕이 너무 강하다고 비가 많이 온다고 덥다고 춥다고 피하기만 하면 결단코 인생의 파도를 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높은 파도가 즐길 만한 존재지만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이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됩니다. 순간 순간 주어지는 고난의 순간은 어쩌면 더 큰 파도와 더 큰 바람을 맞고 넓은 대양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니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모래놀이만 하지 말고, 거친 파도 속으로 뛰어 들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난의 유익을 아무리 말해도 고난은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그 순간을 어떻게 이겨야 할까요?

고난도 은혜도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함께 햇볕을 쬐고, 비를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영적인 회복이 필요하지만, 또한 육적이고 정서적인 회복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은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지적휴식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평상시 잘 사용하지 않는 근육을 사용하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야 이완이 되고 스트레스가 풀립니다.


악기를 연주하고 난 후에는 줄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늘 그 상태를 유지하면 악기가 휘어져서 정확한 음을 연주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몸도 정서도 사회성도 영성도 긴장상태를 너무 오랫동안 유지하면 더 이상 조율이 되지 않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개인에게 맞는 적당한 이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순간 순간 쉬어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 벗어나는 무언가를 찾아서 그 가운데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행을 계획하고, 트레킹을 가고, 운동을 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사람들과 커피 한잔을 하고, 가족들과 바비큐파티를 하고, 독서를 하고, 일광욕을 하고 평상시에는 잘 하지 않던 일들을 찾아서 고난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보십시오.


잘 놀아야 일도 잘하고, 체력이 영력이고, 오래 기다려야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초청 받게 됩니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을 피해 내려가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트레킹을 걷다 보면 고산증세가 나타납니다. 구토현상이 일어나고, 머리가 아프고, 심장이 심하게 뜁니다. 어쩌면 그것이 고산을 적응하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심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내려가면 됩니다. 버티는 것이 아니라 고도가 맞는 곳까지 내려갔다가 고도적응을 하고 다시 올라오면 됩니다. 억지로 버티면 위험해 집니다.


하루에 보통 500미터를 올라가는 것이 고도적응에 적당 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급격하게 고도가 올라가는 곳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곳에서는 하루 쉬었다 가야 합니다.


 믿음을 외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을 혹사시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쉬셨고, 바울도 위험을 피해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쉼을 가지는 것, 고난의 장소를 잠시 떠나는 것을 믿음 없음으로 받아 드리는 순간 우리의 삶은 피폐해질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모든 이가 모두 같은 높이에서 고산병이 오지 않습니다. 육체적 영적인 건강의 상태에 따라서 쉬어가야 하는 곳이 다르고, 건강해 보이지만 심하게 고산이 오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매번 고산이 오는 고도도 달라집니다. 전에는 고산이 없었는데 어떨 때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산증세가 견디기 힘들게 심할 때는 더 이상 오르기를 포기하고 돌아내려 와야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믿음 없음이 아닌 삶과 믿음의 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고난의 순간에는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고산병은 자신이 잘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같이 걷다 보면 동료가 휘청휘청 걷는 것이 보입니다. 그럴 때는 동료를 멈춰 세워야 합니다. 더 이상 무리를 하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친구와 함께 동행하면 실족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가 부부이던, 같은 교단선교사던, 이웃집동료던, 현지인이던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한계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잡아줄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잘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팀들이 오면 버티고 버티다가 자신도 힘들고 결국 팀전체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인생은 혼자 뛰어가야 하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함께 어울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그렇게 손 잡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성탄절마다 선물로 오는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글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그것을 기억하시고 또한 누군가가 혼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3:25~26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배가 요트라고 합니다. 아주 큰 요트는 바닥에 용골이 있고, 작은 요트는 킬이라는 무게 추를 달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요트는 140도 정도까지 넘어져도 다시 복원을 합니다. 그리고 아주 잘 만든 요트는 완전히 뒤집어져도 일정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옵니다. 즉 배에 구멍이 나지 않은 한 침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용골이라는 것이 무게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입니다. 오뚝이와 같이 넘어진 것 같은데 다시 일어섭니다.


요트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외형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용골이듯, 사람도 외형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깊은 중심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누군가에게 고난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그 이유를 찾고 서로 판단하고 심판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중심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혼자 잠든 외로운 그 순간에도 우리를 꼭 안아 주십니다.


그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너의 외로움 괴로움을 다 안다. 잠시 나와 함께 쉬자꾸나. 그리고 내가 손을 잡아 줄 테니 일어나 보렴. 사랑하는 이여 함께 걷자.” 이렇게 속삭여 주실 것입니다.


네팔에 큰 태풍이 불어온답니다. 두렵고 걱정이 됩니다. 또한 각 개인의 삶에 돌풍이 불고 번개가 칩니다.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나지 않고 은혜가 되게 하는 것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난은 은혜의 시작이며, 은혜가 은혜임을 깨닫게 하며, 성도는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아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길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고통스런 고난의 순간 때로는 쉬어가야 하고, 때로는 돌아 내려가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여러분을 잡아 줄 것이고, 여러분이 누군가를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와 진리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징표인 못박히신 손을 내밀어 우리를 잡아 주실 것입니다.


 


고난이 은혜 되게 하는 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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