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0장 13절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사사기는 타락, 고난, 회개, 구원, 평안, 재 타락의 수레를 계속 돌리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뚝 떨어졌다. 그 여파로 금리가 떨어져서 이제는 은행에서 이자 받는 것도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물가상승률을 생각하면 은행에 넣어 둔 돈에 이자가 붙는 것이 아닌 형국이 되어 버렸다.
다들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시대, 6,25를 겪으면서 한 국가가 맞이 할 수 있는 바닥이란 바닥을 다 쳐 버렸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감사해야 할 정도이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사라진 지도 반세기가 되지 않는다.
오늘은 현충일이다. 국립묘지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다. 큰 아버지께서 6.25참전으로 돌아가셨기에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계신다.
한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죽음이 조금은 억울하지 않았을까?
사사기의 반복되는 역사를 보면,
8년 환난을 받고 40년동안 평안
다시 타락해서 18년 고난을 받다가 80년동안 평안
다시 타락해서 20년 고난을 받다가 40년동안 평안……
이런 식으로 반복이 된다.
그런데 고난을 받는 시간보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는 시간이 늘 많다.
그런데 만약 내가 살아가는 날들 중에 20년이 환난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일제강점의 36년을 거쳐왔던 분들은 그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싶어하시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을 막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욕심과 죄악이다.
입다라는 사사가 나타나기 전에 7명의 사사가 지나갔다. 늘 그렇듯이 반복되는 역사와 함께.
다시 18년 동안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다시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나온다. 제발 다시 도와달라고.
이만 하면 뻔뻔함이 극에 달한다.
조강지처를 버리는 사람은 욕을 먹는다. 조강지처는 처음 맞이한 아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게미와 쌀겨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할 때 함께 했던 아내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고생을 함께 안 한 아내는 버려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하
이 글의 요지는 고생이라는 고생을 다 함께 겪은 아내를 살림이 펴지고, 살만하니 버리는 사람은 욕을 먹는다는 뜻이다.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이다. (이런 표현해도 되나??? 하하)
성경과 별도로 왜 요즘 이혼이 많아졌을까?에 대한 한 가지 생각은, 조강지처가 없기 때문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함께 고생을 해 본적이 없으니 고난이 오면 견디지를 못한다. 함께 고생을 하면서 생긴 동지의식이 없다고 봐야 할까? 그래서 무일푼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추천한다.
어렵게 시작해서 함께 기쁨을 누리는 행복한 부부가 되기를 바라본다.
다음 장에서는 함부로 맹세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입다를 통해서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함부로 맹세를 했지만 입다는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어려울 때는 맹세하고 헌신을 고백하지만 어느 순간 삶이 평안해지면 그 고백들을 다 잊어 버린다.
그래서 다시 고난이 찾아오면 그 때서야 본인이 한 약속을 기억해 낸다.
10장 13절에서는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다시는……
만약 이 말씀을 지키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도 실망하시고 마음을 바꾸시고 때때로는 버리신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
왜 그들을 버리시고 싶으신 것일까? 왜 그들을 다시는 구원하고 싶지 않으신 것일까?
그것은 조강지처를 버린 사람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저희는 안 그러잖아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사기의 이야기를 보면, 사람은 바뀌어도 끊임없이 배신하고 등 돌리는 이스라엘에 하나님도 신물이 나셨다.
하나님도 후회를 하신다. 사람을 만드신 것 자체를 후회하셨다.
부모로부터 “차라리 너를 낳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런 말을 듣는다면, 최악인 것이다.
연애를 하면서 두 번만 바람을 피워도 다시는 안 볼 것이다.
만약 결혼한 관계라면 한 번이면 거의 끝장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결혼한 이스라엘은 시도 때도 집을 나간다.
우상숭배 그것은 하나님과의 결혼 관계를 깨고 영적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성적인 타락과 영적인 타락은 거의 같다.
결혼한 부부관계에서 성적인 타락이 용납될 수 없는 것 같이, 영적인 삶에서 우상숭배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도 좋고, 불교도 좋고, 힌두교도 좋고…..라고 말하는 것은, 이 남자도 좋고, 저 남자도 좋고, 그렇게 말하면서 남편에게 “저 두 번째 남자 만나고 올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되는가?
아니 이것보다 더 한 것이 우상숭배이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다시는 너희를 구원할 생각도 없으니 짐 싸가지고 돌아올 생각도 말아.
그런데 여기에 사랑이 숨겨져 있다.
참으로 자신이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온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했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욕을 들으셨는가? 이집트를 망하게 하면서, 가나안 사람들을 죽여가면서 이스라엘을 편애하신다) 그 사랑을 요구할 자격을 갖고 계셨다. (11절, 12절)
그리고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고 말하시다가도 그들이 다시 돌아오니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라고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적고 있다.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하셨지만 사랑하는 이의 고난을 차마 못 견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호세아서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창녀로 전락해 버린 첫 사랑, 애도 버리고 다른 남자 품에 안긴 여인.
돌을 던져서 죽여도 시원찮을,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해도 아무도 손가락질 하지 않을 그런 상황에서 돈을 주고 아내를 사와야 하는 호세아의 처량함.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처량함이다.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하나님이 매몰차다고.
하나님은 너무 꽉 막혀서 우리의 숨통을 조인다고.
누가 그러던가?
그는 과연 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다시는 구원해주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후에도, 그들의 어려움 때문에 마음에 근심이 생긴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사랑에 마음 아파해 본 적이 있는가?
내가 더 사랑해 준 것 같은데 돌아선 그/그녀를 보면서 배신감을 느낀 적이 있는가?
“당신이 내게 해 준 것이 뭐야.”라는 소리에 가슴이 무너져 본 적이 있는가?
다시는…다시는…다시는………….
.
.
.
.
.
.
..
.
.
.
.
.
.
.
.
그래도…그래도…그래도…난 널 사랑한단다.
이 땅을 지켜준 분들에게 눈물로 감사하고, 날 영원히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한 날이다.
'내 마음의 성경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답게 살기... (0) | 2013.07.15 |
---|---|
돈을 위해 사랑을 포기한 여인 (0) | 2013.06.17 |
내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내 나중에 미약하리라 (0) | 2013.06.06 |
300 (0) | 2013.06.05 |
알지 못해서 망한 이들. (0) | 201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