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1장 27-28
나는 우리 집에서 믿음의 1세대이다.
내가 믿고 남동생이 믿었고, 신학교를 간 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누나(불교회장이었던)가 우여곡절 가운데 목회자의 사모로 살고 있다.
예수를 믿고 2년만에 신학대학을 갔다.
그것도 모교회는 기성인데 목사님의 추천으로 예성으로 갔다.
목사님의 아들 중에 기성에도 예성에도 목회자가 있으셨다.
안양에 아는 교회 아는 사람 아는 목사님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신학생 4년 동안 봉사한 개척교회는 또 기성이었다.
한 달에 5만원의 차비를 받으면서 개척교회에서 재밌고 신나게 생활했다.
그 때 만났던 청년들과는 지금도 만나고 있다.
그렇게 부럽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선교사로 나올 때가 되니 부러운 것이 있었다.
목회자의 아들, 장로의 아들이라는 신분이었다.
선교사 후원을 위해 찾아가는 교회마다 툇짜를 맞았다.
교단의 큰 교회에서 일한 경력도 없어, 그렇다고 아는 분도 없었다.
선교사를 파송할 준비를 한다는 교회를 찾아가 보면 이미 신청한 사람들이 많았다.
학벌에서, 경력에서, 인맥에서 밀리고 밀렸다.
이제 막 신대원을 졸업하고 선교사로 가는 그것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예수를 믿은 시골출신의 선교사의 인맥으로는 선교지원을 받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2년을 봉사한 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친구들과 아는 분들의 후원으로 첫번째 5년을 살았다.
5년이 지나 첫 안식년을 하러 올 때 4가족 비행기값 내고 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한번도 불행하다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다.
일명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
참 그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신앙적인 인맥이라도 없으면 재정적인 풍족함이라도 있었다면 좋으련만.
주위에 힘들게 목회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저절로 기도하게 된다.
그들의 마음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알기 때문이다.
15년이 지난 지금은 아는 분들도 많았졌고, 선교사가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분들도 알게 되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알지 못했을 의사분들, 연예인, 목사님들, 대사님들, 그리고 많은 선교에 관심을 가진 분들과 만났다.
그런데도 간혹 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척척 차량을 구입하고 사역을 시작하는 분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오늘 본문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자식이 당신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을 우리식의 말로 하면 "내 아버지가 굉장한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당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은 참 좋겟다는 의미는 아닐까.
나도 당신과 그런 관계였으면 좋겟는데.
누군가 굉장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의 친인척비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요즘 한창 대두되고 있는 롯데그룹의 분쟁을 보면서 굉장한 아버지를 둔 것이 꼭 복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마른 떡 하나를 나누어 먹고 화평한 것이 육선이 가득하고 분쟁하는 것보다 낫다고 잠언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참 욕심이 많아서 화평하면서 육선이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얼마 전에 사랑하는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남겨 놓은 재산이 별로 없으셔서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 쓰실 수 있도록 하려고 준비 중이다.
하지만 자녀가 많다보니 생각도 조금씩 다르고, 기대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어찌 사람의 마음에 욕심이 한점도 없을 수 있겠는가.
형제들간에 서로 마음을 잘 합쳐서 아름다운 결과가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본가가 처가가 잘 살면 기대하게 되고, 어쩌면 그것으로 조금 여유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산으로 인한 형제들간의 분쟁을 수도 없이 듣고 봐 오면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느끼게 된다.
예수님.
당신과 관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한 여인이 기대했던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세례요한과 언젠가 비교해 보았던 예수님.
대제사장의 아들과 목수의 아들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단정지어지는 땅 나사렛에서 자라신 예수님.
과부의 아들.
동생들이 줄줄이 딸린 장남.
30대 초반의 나이에 50대의 얼굴로 평가 되었던 슬픔과 고뇌에 찬 사람.
인맥도 가진 재산도 그렇다고 바울처럼 학벌이 뛰어나지도 않은.
동생이었던 야고보에게도 한동안 인정 받지 못한 한 사람 예수.
아마 요즘의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결혼하기 힘드셨을 것이다.
예수님 같은 사람을 자매들이 꿈꾸겠지만, 위의 조건을 보시라.
그리고 집을 나가면 들어오질 않네. 하하하
그리곤 자신의 꿈을 위해 목숨도 버리는 무대포정신.
자신의 가진 것은 언제든지 남을 위해 다 주어 버리는 빈손 정신.
그런데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생각은 일괄적이시다.
"누가 나의 부모와 형제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행하는 자)가 바로 나의 부모와 형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조금 남들보다 좋은 인맥을 가지는 것.
재정적인 부요함을 누려보는 것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누린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면 그것이 꼭 성공적이라고 하기에는 힘든 현실이다.
아니 도리어 그런 관계에서 오는 부담감으로 인한 상처와 실패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니 부러운 것은 부러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부러워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인맥, 재능, 경제력이 아닌 하나님을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다.
그래서 인격으로 삶으로 평가되는 평가를 통과한 이들이 나는 부럽다.
교인수로 평가되는 것이 아닌 삶으로 평가되는 목회자가 난 부럽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많이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교통법규를 알지만 쉽게 어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복이 없다.
꼭 벌금 딱지가 날아와서가 아니다.
내 마음에 있는 중앙선, 교통법규를 무시할 때 인생은 뒤틀리고 망가져 가는 것이다.
부부관계가 왜 뒤들리는가?
그것은 서로에 대한 약속을 어기기 때문이다.
서로 지키기로 한, 서로 기대하고 있는 것들을 깨 버릴 때 신뢰가 깨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가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신뢰가 구축되었으니 복을 안 줄래야 안 줄수가 없다.
이 복을 물질의 복으로만 제한 하지 마시라.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고 사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 하게 될 것이다.
복이 있는자.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이다.
그렇게 되면 시편 1편에서 제시하고 있는 다른 현상들은 따라서 오는 것이다.
내 마음에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 놓고 주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삶.
그것이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
나의 아이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고 싶다.
아이들에게는 조금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군가 "너의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시니?'라고 물을 때, 아이들이 어깨 쫙 펴고 우리의 이름을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고 나의 손자 손녀들도 자신의 아버지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아이들로 자라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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